보주 광장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보주 광장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광장으로, 1605년부터 1612년까지 앙리 4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루아얄 광장으로도 알려졌으며, 유럽 최초의 왕실 도시 계획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루이 13세와 오스트리아의 안의 약혼을 기념하는 마상 경기로 개장되었으며, 이후 유럽 주거 광장의 원형이 되었다. 광장은 여러 차례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현재는 풀과 피나무가 있는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 빅토르 위고 생가, 쉴리 호텔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과 인물들이 이 광장에 위치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마레 - 카르나발레 박물관
파리 마레 지구에 위치한 카르나발레 박물관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 파리의 역사와 변천사를 보여주는 60만 점 이상의 회화, 조각, 가구, 사진 등 다양한 소장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 마레 - 쇼아 기념관
쇼아 기념관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홀로코스트 기념관으로, 나치 독일 치하 유대인 희생자를 기리고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연구하며 홀로코스트 교육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 파리 3구의 건축물 - 레퓌블리크 광장
레퓌블리크 광장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광장으로, 프랑스 공화국을 의인화한 마리안 동상과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2010년부터 보행자 전용 구역으로 개조되었고 테러 공격 이후 시위와 집회가 열린 교통의 요지이다. - 파리 3구의 건축물 - 카르나발레 박물관
파리 마레 지구에 위치한 카르나발레 박물관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 파리의 역사와 변천사를 보여주는 60만 점 이상의 회화, 조각, 가구, 사진 등 다양한 소장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보주 광장 | |
---|---|
개요 | |
![]() | |
위치 | 프랑스 파리 3구, 4구 |
행정 구역 | 아카이브 지구, 아스날 지구 |
좌표 | 48 |
상세 정보 | |
명칭 | Place des Vosges (프랑스어) |
길이 | 140m |
너비 | 140m |
완공일 | 1605년 7월 |
비고 | url=http://www.paris.fr/portail/Culture/Portal.lut?page_id=5932&document_type_id=5&document_id=12767&portlet_id=13289 |
도로 정보 | |
시작점 | 비라그 가 11 bis |
종점 | 베아른 가 1 |
2. 역사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프랑스어)은 원래 루아얄 광장(Place Royale프랑스어)으로 불렸으며, 1605년부터 1612년까지 앙리 4세 국왕의 지시로 건설되었다.[1] 가로세로 각각 140m의 정사각형 형태로, 유럽 최초의 왕실 주도 도시 계획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1] 광장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투르넬 저택과 그 정원이 있던 곳이었다.[1]
1612년 루이 13세와 오스트리아의 안의 약혼을 기념하는 성대한 마상 경기와 함께 개장한[2] 루아얄 광장은 이후 유럽 주거 광장의 원형이 되었으며,[1] 동일한 디자인의 붉은 벽돌 건물들이 아케이드를 따라 늘어선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1] 광장은 완공 이후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귀족들이 교류하는 주요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었다.[3]
광장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잠시 '무기 제조 광장'(Place de la Fabrication-des-Armes프랑스어)으로 불렸고,[5] 1800년에는 혁명 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보주 데파르트망을 기리기 위해 '보주 광장'으로 명명되었다.[5] 이후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1814년~1830년)와 제2제정 시기(1852년~1870년)에는 다시 '루아얄 광장'으로 불리기도 했으나,[5] 1870년에 최종적으로 '보주 광장'이라는 이름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5]
2. 1. 건설 배경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프랑스어)은 원래 루아얄 광장(Place Royale프랑스어)으로 불렸으며, 1605년부터 1612년까지 앙리 4세의 명령으로 건설되었다.[1] 이 광장은 투르넬 저택과 그 정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는데, 이 정원은 카트린 드 메디치에 의해 철거된 곳이었다.[1]
가로세로 각각 140m의 정사각형 형태인 이곳은 유럽 최초의 왕실 주도 도시 계획 프로그램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은 1590년에 계획이 시작되었다.)[1] 광장은 1612년, 루이 13세와 오스트리아의 안의 약혼을 기념하는 성대한 마상 경기와 함께 공식적으로 개장했으며,[2] 이후 유럽 여러 도시에서 만들어지는 주거용 광장의 본보기가 되었다.[1]
루아얄 광장의 가장 큰 특징은 광장을 둘러싼 모든 건물의 정면이 장 밥티스트 앙드루에 뒤 세르소가 설계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일한 디자인으로 통일되었다는 점이다.[1] 붉은 벽돌 건물에 석재로 모서리를 장식했으며, 1층에는 사각 기둥이 받치는 아치형 아케이드가 이어져 있다. 경사진 푸른 슬레이트 지붕에는 작은 다락 창문과 페디먼트(박공) 장식이 있는 돔형 창문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었다.[1] 다만 북쪽 건물만이 계획대로 아치형 천장이 있는 '갤러리' 형태로 만들어졌다.[1]
광장의 남쪽과 북쪽 중앙에는 광장의 통일된 지붕선보다 높이 솟은 두 개의 특별한 건물이 있는데, 각각 '왕의 파빌리온'과 '여왕의 파빌리온'으로 불린다. 이 파빌리온의 삼중 아치를 통해 광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1] 하지만 이름과 달리, 오스트리아의 안이 여왕의 파빌리온에 잠시 머문 것을 제외하고는 실제 왕족이 이곳에 거주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1] 루아얄 광장은 당시 프랑스 귀족들에게 세련된 도시 생활의 배경을 제공했으며,[1] 귀족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만남의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이러한 역할은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이어졌다.[3]
앙리 4세는 루아얄 광장이 완공되기도 전에 이미 도핀 광장 건설을 지시하는 등, 파리 도시 정비에 큰 관심을 보였다.[1] 불과 5년 만에 그는 중세 도시 파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여러 건축 계획을 추진했는데, 루브르 박물관 확장, 퐁네프 다리 건설, 생 루이 병원 건립 등이 대표적이다.[1]
훗날 리슐리외 추기경은 광장 중앙에 루이 13세의 기마 청동상을 세웠다.[4]
2. 2. 루아얄 광장 시대
보주 광장은 원래 루아얄 광장(Place Royale프랑스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1605년부터 1612년까지 앙리 4세 국왕의 지시로 건설되었다.[1] 140m × 140m 크기의 진정한 정사각형 모양을 갖춘 이 광장은 유럽 최초의 왕실 주도 도시 계획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은 1590년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광장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투르넬 저택과 그 정원이 있었으나, 카트린 드 메디치에 의해 철거되었다.[2]루아얄 광장은 1612년, 루이 13세와 오스트리아의 안의 약혼을 기념하는 성대한 마상 경기를 열며 공식적으로 개장했다.[3] 이후 유럽 여러 도시에서 건설된 주거용 광장의 원형이 되었다.[4] 루아얄 광장의 혁신적인 점은 광장을 둘러싼 모든 건물의 정면이 동일한 디자인으로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장 밥티스트 앙드루에 뒤 세르소가 설계했을 것으로 추정되며[5], 아치형 아케이드가 늘어선 1층 위로 붉은 벽돌과 석재 콰인(quoins)을 사용하여 외벽을 마감했다. 아케이드는 사각 기둥 위에 세워졌다. 경사진 푸른 슬레이트 지붕에는 박공(pediment)이 있는 작은 다락창(dormer window)들이 뚫려 있다. 북쪽 건물만이 원래 계획대로 아치형 천장을 가진 '갤러리'로 건설되었다.
광장의 북쪽과 남쪽 끝에는 광장의 통일된 지붕선보다 높이 솟은 두 개의 파빌리온이 있으며, 각각 삼중 아치를 통해 광장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들은 각각 왕의 파빌리온(Pavillon du Roi)과 여왕의 파빌리온(Pavillon de la Reine)으로 불렸지만, 오스트리아의 안이 여왕의 파빌리온에 잠시 거주한 것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왕족이 이곳에 살지는 않았다. 루아얄 광장은 프랑스 귀족들에게 어울리는 도시 환경을 제공하며 이후 파리의 도시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광장은 귀족들이 서로 교류하고 만남을 갖는 주요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이러한 역할은 프랑스 혁명 발발 전까지 이어졌다.
광장이 완공되기도 전에 앙리 4세는 도핀 광장 건설을 지시했다. 불과 5년 만에 그는 파리의 중세적인 모습을 탈피하기 위한 야심 찬 건축 계획을 추진했으며, 루브르 박물관 확장, 퐁네프 다리 건설, 생 루이 병원 건립과 함께 두 개의 왕실 광장(루아얄 광장, 도핀 광장) 건설은 그의 주요 업적에 속한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광장 중앙에 루이 13세의 기마 청동상을 세웠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귀족들이 생 제르맹 교외 지구로 거주지를 옮겼지만, 광장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일부 귀족 소유로 남아 있었다. 혁명 시기에는 잠시 '무기 제조 광장'(Place de la Fabrication-des-Armes프랑스어)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으나, 1800년에는 혁명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세금을 납부한 보주 데파르트망을 기리기 위해 공식적으로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프랑스어)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인 1814년부터 1830년까지, 그리고 1852년부터 1870년까지는 다시 원래 이름인 '루아얄 광장'으로 불렸다. 1830년에는 잠시 '공화국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프랑스어)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1870년에 최종적으로 혁명 시기의 이름인 '보주 광장'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3. 귀족들의 만남의 장소
앙리 4세에 의해 건설된 루아얄 광장(Place Royale프랑스어, 현재의 보주 광장)은 파리 최초의 계획된 광장 중 하나로, 귀족들을 위한 도시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1612년 루이 13세와 오스트리아의 안의 약혼을 기념하는 성대한 마상 경기로 개장한 이후, 이곳은 프랑스 귀족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중요한 사교 및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역할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18세기 후반, 많은 귀족들이 생 제르맹 교외 지구로 거주지를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혁명 전까지 일부 귀족들은 여전히 보주 광장에 거주하며 그 명맥을 유지했다. 혁명 이후 광장의 이름은 잠시 "무기 제조 광장"(Place de la Fabrication-des-Armes프랑스어)으로 변경되었다. 1800년에는 혁명군을 지원하는 세금을 가장 먼저 납부한 보주의 데파르트망을 기리기 위해 공식적으로 보주 광장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이후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에는 잠시 원래 이름인 루아얄 광장으로 복원되었으나, 1870년에 다시 보주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확정되었다.
2. 4. 앙리 4세의 도시 계획
보주 광장은 원래 루아얄 광장(Place Royale프랑스어)으로 불렸으며, 앙리 4세의 주도로 1605년부터 1612년까지 건설되었다. 가로세로 각각 140m의 정사각형 형태인 이 광장은 유럽 최초의 왕실 도시 계획 프로그램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은 1590년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광장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철거한 투르넬 저택의 정원이 있던 곳이었다.루아얄 광장은 1612년,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의 약혼을 기념하는 성대한 마상 창 시합과 함께 공식적으로 개장했으며, 이후 유럽 여러 도시에서 건설된 주거 광장의 원형이 되었다. 루아얄 광장의 혁신적인 점은 광장을 둘러싼 모든 건물의 정면이 동일한 디자인으로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설계는 장 밥티스트 앙드루에 뒤 세르소가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들은 아치형 아케이드 위에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모서리는 석재로 마감되었으며, 아케이드는 사각 기둥 위에 세워졌다. 경사진 푸른 슬레이트 지붕에는 작은 다락 창문이 뚫려 있고, 그 위 처마 장식 위로는 페디먼트가 있는 더 큰 다락 창문이 솟아 있다. 북쪽 건물만이 아치형 천장으로 지어졌는데, 이곳은 원래 '갤러리'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광장의 통일된 지붕선 위로 북쪽과 남쪽에 두 개의 높은 파빌리온이 솟아 있으며, 각각 세 개의 아치를 통해 광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들은 각각 왕의 파빌리온과 여왕의 파빌리온으로 불렸지만, 안 도트리슈가 여왕의 파빌리온에 잠시 거주한 것을 제외하고는 실제 왕족이 이곳에 살았던 적은 거의 없다. 루아얄 광장은 프랑스 귀족들에게 적합한 도시 환경을 제공했으며, 이후 파리의 다른 지역 개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광장은 완공 이후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귀족들이 담소를 나누고 교류하는 주요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앙리 4세는 루아얄 광장이 완공되기도 전에 이미 도핀 광장 건설을 지시했다. 불과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중세 도시 파리를 현대적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야심 찬 건축 계획을 추진했으며, 루브르궁 확장, 퐁뇌프 건설, 생 루이 병원 건립, 그리고 두 개의 왕실 광장(루아얄 광장, 도핀 광장) 건설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2. 5. 이름 변경
보주 광장은 원래 '''루아얄 광장'''(Place Royale프랑스어)으로 불렸다.[1]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잠시 '''무기 제조 광장'''(Place de la Fabrication-des-Armes프랑스어)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5] 1800년, 혁명 정부를 재정적으로 가장 먼저 지원한 보주 데파르트망을 기리기 위해 공식적으로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프랑스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5]이후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인 1814년부터 1830년까지, 그리고 제2제정기인 1852년부터 1870년까지는 군주정에 의해 다시 원래 이름인 '''루아얄 광장'''으로 불렸다.[5] 1830년 7월 혁명 직후에는 잠시 '''공화국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프랑스어)으로 불리기도 했다.[5] 최종적으로 1870년에 혁명 시기의 이름인 '''보주 광장'''이 복원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5]
3. 주요 건물 및 거주자
(섹션 내용 없음)
참조
[1]
문서
Other architects, like Louis Métezeau, were responsible for the constructions erected behind these regular façades
[2]
서적
Daring Genius of the Enlightenment
Penguin
[3]
뉴스
Les appartements parisiens du couple Strauss-Kahn
http://www.lexpress.[...]
www.lexpress.fr
2011-05-11
[4]
뉴스
La place des Vosges veut oublier DSK
http://www.leparisie[...]
www.leparisien.fr
2012-08-21
[5]
웹사이트
Site municipal de Paris, maisons de Victor Hugo : Victor Hugo, place Royale, 1832-1848
http://www.paris.fr/[...]
2009-07-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